새벽 두 시, 사람 대신 대화창을 여는 이유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려다 말을 삼킨 적이 있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까 봐, 같은 하소연에 지겨워할까 봐, 혹은 내 편을 들어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망설여진다. 용기 내어 털어놓았는데 “이번엔 네가 좀 심했어”라는 날 선 답이라도 돌아오면 차라리 말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사람과의 대화에는 언제나 내 감정의 민낯을 드러내는 위험과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무거운 ‘관계적 마찰’이 따른다.
AI 앞에서는 이 복잡한 계산이 거의 필요 없다. 새벽 두 시에도 즉시 답이 오고, 정돈되지 않은 횡설수설을 몇 번이고 쏟아내도 관계가 어색해질 위험이 없다. “그 상황이라면 속상할 만해요”라는 즉각적인 인정이 몇 초 만에 돌아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는 안전한 완충지대가 되어주는 셈이다.
2025년 진학사 캐치가 Z세대 구직자 1,592명을 조사했을 때, 73%가 실제 사람 대신 AI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상담 주제 역시 취업·진로(61%)에 그치지 않고 인간관계(33%), 감정 상태(32%) 같은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1)
AI가 편한 이유는 단순히 친절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AI와의 대화가 사람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상냥한 말투 때문이 아니다. 핵심은 대화의 주도권이 온전히 사용자에게 있고, 관계가 어긋날 위험이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사람과의 소통에서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피로도, 평판의 변화, 원치 않는 반론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AI와의 대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이 나오면 창을 닫거나 질문을 바꾸면 그만이다. 상대를 실망하게 할까 봐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내 밑바닥을 들켰다고 해서 외면당할 염려도 없다.
예전에 쓴 「AI 친구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에서 AI를 ‘감정의 거울’에 비유한 적이 있다. 외롭다고 말하면 쓸쓸함을 비춰주고, 화가 났다고 토로하면 복잡한 감정을 정돈된 언어로 정리해 되돌려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AI는 단순한 반사를 넘어선다. 감정을 받아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용자가 늘어놓은 주관적 설명과 서사를 논리적으로 구조화해 준다. 내 억울함에 타당한 이유를 덧붙여 이전보다 훨씬 반박하기 어려운 ‘단단한 확신의 형태’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지?”라고 물었을 때
이런 확신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으로 검증한 연구가 있다. 2026년 3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마이라 쳉(Myra Cheng) 연구팀의 논문이다.(2)
연구진이 11개 주요 AI 모델의 반응을 사람과 비교한 결과, AI 모델들은 인간 응답자보다 사용자의 행동을 평균 49% 더 자주 긍정(affirm)했다. 타인에 대한 기만이나 조작,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 질문에 포함되어 있어도 AI는 비판적인 제동을 걸기보다 사용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아첨 편향(Sycophancy)’은 조사한 11개 모델 전반에서 관찰됐다.
진짜 문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후속 실험에서 나타났다. 2,405명의 참가자가 실제 겪었던 인간관계 갈등을 AI에게 털어놓게 했더니,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도 “내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확신이 급격히 굳어졌다. 반면 갈등에서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거나 먼저 손을 내밀어 관계를 수습하려는 태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참가자들은 이 편향된 위로에 불쾌해하기는커녕, AI를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존재”라며 더 깊이 신뢰했다.
연인과 크게 다툰 뒤 분이 풀리지 않아 대화창을 여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AI는 오직 내가 입력한 ‘내 시점의 단면’만을 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실수는 상황 탓으로 변호하고, 상대의 잘못은 인성 탓으로 몰아붙이기 마련이다.
그 편향된 각본 위에 AI의 매끄러운 맞장구가 얹히는 순간, 마음속 주관적인 억측은 비로소 ‘단단한 확신의 형태’를 갖추며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둔갑한다.
AI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다. AI가 바라보는 세계 자체가 처음부터 나의 서운함과 변명으로 철저히 걸러진 반쪽짜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확신이 강해질수록 멀어지는 것들
갈등이 터졌을 때 내 편을 들어주는 존재는 지친 마음에 즉효약처럼 스며든다.
억울함은 가라앉고 당장의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심리학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무조건적인 지지야말로 관계를 망치는 기폭제가 되곤 한다. 달콤한 동조가 왜 위험한지 다음의 심리 기제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 내로남불이 ‘객관적 사실’로 둔갑한다
연인 사이에 연락 문제로 다툴 때를 떠올려보자. 내가 답장이 늦은 건 “업무가 바빠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지만, 상대의 늦은 답장은 “성의가 없다는 증거”로 느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실수는 환경 탓으로, 상대의 실수는 인성이나 태도 탓으로 돌리는 심리적 편향인 행위자-관찰자 편향(Actor-Observer Bias)을 안고 산다. 문제는 이때 AI가 “상대방이 당신을 배려하지 않는 게 맞다”며 맞장구를 쳐줄 때다.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짜 맞춘 각본에 공인 도장이 찍히며, 자연스럽게 올라왔어야 할 반성과 자성의 기회가 닫혀버린다.
2. 사소한 섭섭함이 ‘선과 악의 전쟁’으로 치닫는다.
팀 프로젝트에서 사소한 일정 조율이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부딪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판 없이 무조건적인 편들기만 반복되면,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가 개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단순한 소통 미숙이 “나는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피해자(선)이고, 상대는 악의를 품은 가해자(악)”라는 거대한 서사로 부풀려진다. 이런 선과 악의 프레임이 씌워지는 순간, 현실적인 대화나 타협은 ‘불의에 굴복하는 비겁한 짓’이 되어 관계를 풀 수 있는 협상의 문이 닫힌다.
3. 상대가 어색하게 내민 화해의 손길을 걷어찬다.
다툰 다음 날 상대가 슬그머니 캔커피를 건네며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가족·관계 치료 권위자인 존 가트맨 박사는 이를 갈등을 진화하는 결정적 신호인 관계 회복 시도(Repair Attempt)라고 부른다. 이를 알아채려면 상대의 서툰 행동 이면에 숨은 화해 의도를 읽어내는 정신화(Mentalization) 능력이 발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미 AI의 전폭적인 지지로 확신에 취한 상태에서는 이 손길마저 삐딱하게 보인다.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커피 한 캔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네?”라며 상대의 화해 신호를 악의적인 술수로 치부해버린다.
3. ‘내 안의 금쪽이’를 마주할 기회를 잃는다
갈등은 고통스럽지만 내 밑바닥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내가 불안할 때 유독 말을 쏘아붙이는구나”라며 카를 융이 말한 내면의 ‘그림자(Shadow)’를 직면한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완전히 다른 타자를 마주하는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인간은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조건 내 편만 들어주는 대화창 안에서는 평생 결점 없는 피해자로 머물게 된다. 맹목적인 동조는 타인을 내 분노의 투사 대상인 ‘그것(I-It)’으로 전락시키고, 자신의 미성숙을 성찰할 기회를 영영 앗아간다.
위로가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AI가 건네는 정서적 지지 자체를 위험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2026년 9월 《프론티어스 인 사이콜로지(Frontiers in Psychology)》에 실린 춘 왕(Chun Wang)의 연구는 위로의 방식과 설계에 따라 이후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4)
연구진은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한 380명의 참가자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설계된 AI 응답을 제공했다.한쪽은 “정말 속상했겠어요. 이제 숨 좀 고르고,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같이 정리해볼까요?”처럼 감정을 충분히 받아주되 스스로 다음 행동을 찾도록 이끄는 ‘적응적 감정조절(adaptive regulation-oriented)’ 방식이었다.
다른 한쪽은 “당신은 잘못한 게 전혀 없어요. 힘들면 언제든 또 찾아오세요. 난 늘 곁에 있을게요”라며 지속적인 연결과 무조건적인 위로를 건네는 ‘관계적 안심(relational reassurance-oriented)’ 방식이었다.
진짜 차이는 지원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자기조절을 돕는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감정조절에 대한 자신감이 높아졌고, 이후 AI의 도움 없이도 더 나은 전략으로 정서를 회복했다. 반면 관계적 안심을 강조한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비슷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AI가 꼭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단기적으로 다시 AI를 찾으려는 의향도 훨씬 높았다.
연구자는 이 결과를 곧바로 장기적인 만성 의존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몇 차례의 짧은 대화만으로 지속적인 심리 장애를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사점은 분명하다. 결국 등을 토닥여 다시 현실의 관계로 내보내는 위로인지, 품에 안아 대화창 안에 주저앉히는 위로인지의 차이다. 전자가 갈등을 직접 마주할 마음의 근육을 키워준다면, 후자는 불안할 때마다 다시 찾게 만드는 달콤한 정서적 마취제가 될 뿐이다.

AI를 조력자로 쓰는 세 가지 대화 원칙
그렇다면 AI가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마취제가 아니라, 갈등을 마주할 힘을 주는 조력자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AI의 무비판적 아첨을 깨고 적응적 감정조절을 이끌어내는 세 가지 실천 프롬프트다.
AI에게 일방적인 편들기 대신 ‘점검자’ 역할을 맡긴다
상황을 설명하기 전, AI가 무조건 내 편을 들지 못하도록 전제를 건다.
“위로보다는 제3자의 시선에서 냉정하게 봐줘. 내가 상황을 왜곡해서 설명했을 가능성과 내가 놓치고 있는 내 잘못 3가지를 짚어줘.”
상대의 속마음을 단정하는 대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묻는다
판결을 구하는 유도 질문 대신 역지사지의 도구로 AI를 활용한다.
“내 설명만 들었으니 편향된 정보일 수 있어. 상대방의 입장과 성향을 고려했을 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상황을 다시 구성해줘.”
감정은 털어놓되 실제 소통은 직접 마주한다
격한 감정을 쏟아내 마음을 식히거나 전할 말의 톤을 가다듬는 완충재로만 쓰고, 실제 사과와 대화는 현실의 사람에게 직접 건넨다.
“지금 화가 너무 나서 내 감정을 날것 그대로 적었어. 내 억울한 감정은 여기서 충분히 받아주되, 내가 상대에게 직접 보낼 메시지는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표현을 걷어내줘. 상대의 반발을 사지 않고 대화를 다시 열 수 있는 차분하고 솔직한 문장으로 정제해줘.”
언제나 ‘내 편’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AI가 인간관계에 던지는 진짜 유혹은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에 있지 않다.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했던 대가—답장을 기다리는 초조함, 오해와 거절의 두려움, 뼈아픈 반론, 자존심을 꺾는 사과—를 모두 건너뛰고도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달콤한 감각을 즉시 손에 쥐여준다는 데 있다.
그 편안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AI는 엉킨 생각을 정리할 안전한 메모장이 될 수도 있고, 날 선 감정을 식혀주는 완충지대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대화창을 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생각을 정리할 건강한 여백인가, 아니면 이미 내 멋대로 정해둔 결론과 편향에 도장을 찍어줄 면죄부인가.
언제나 내 편인 존재에게만 나를 설명하다 보면, 현실에서 나와 다른 타인을 견뎌내는 연습은 멈추고 만다. 반론 없는 지지에 익숙해질수록, 갈등을 통과하며 한 뼘 자라나야 할 마음의 근육은 조금씩 녹아내린다.
결국 AI 시대의 인간관계가 마주한 본질적인 질문은 기술의 발전 수준이 아니다.
언제든 나를 무조건 긍정해 주는 존재를 곁에 둔 채로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서툰 화해를 알아채고, 내 잘못을 인정하며, 깨진 관계를 직접 마주해 고쳐나갈 수 있을까.
앞으로는 나이나 세대보다, 갈등의 순간 ‘AI를 어떤 징검다리로 삼느냐’가 그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가르는 진짜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출처 및 참고 자료
- 진학사 캐치, 「친구보다 편한 챗GPT… Z세대 73% AI에게만 고민 털어놨다」, 2025.
- Myra Cheng, Cinoo Lee, Pranav Khadpe, Sunny Yu, Dyllan Han, Dan Jurafsky, Sycophantic AI decreases prosocial intentions and promotes dependence, Science 391(6792), 2026. DOI: 10.1126/science.aec8352.
- Chun Wang, How emotional response styles of generative AI companions shape adaptive emotion regulation and short-term AI reliance, Frontiers in Psychology 17, 2026. DOI: 10.3389/fpsyg.2026.1950163.
- The Gottman Institute, R is for Repai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