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회의시간 중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리고 커피숍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에 나도 모른체 의미 없는 원이나 선을 그리는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사실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낙서 충동은 성별, 인종, 직업, 세대와 계층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낙서를 하는 것일까?
평범한 메모지나 휴지에서부터 담벼락, 공용화장실, 유명 관광명소에까지 기를 쓰고 낙서하는 우리의 행위 밑바닥에는 과연 어떠한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일까?
위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낙서의 역사부터 시작해 낙서하는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낙서만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연구 자료와 논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낙서에 대해 읽어가는 동안 공부의 능률을 올리고, 심리적 안정을 취하며, 업무 효율을 높이는 방법에 관한 팁을 얻을 있으며, 또한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철학적인 질문을 가져보는 꽤 괜찮은 시간이 될 것이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부터 시작된 낙서
종이에 아무 의미 없이 끄적이는 낙서하는 행위를 현재의 힘든 상황을 잠시 벗어나려는 일탈 행위나 유아적 돌출 행동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낙서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유적전으로 각인되어온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낙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낙서의 역사를 원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정리해보았다. (1)
낙서하는 인류 – 호모 그래피티(Homo Graffiti)
낙서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인류의 역사와 고락을 함께 해온 낙서는 단순히 개인적인 행위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낙서를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행위로 정의면서, 인류를 ‘낙서하는 존재’ 호모 그래피티(Homo Graffiti)라 정의 내린다.

우리가 낙서를 하는 이유들
지금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낙서를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왜 낙서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인간이 낙서를 하는 이유에 대한 많은 심리학적 연구는 진행 중이지만 여러 가설들만 존재할 뿐 명확한 이유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음의 다섯 가지 가설은 인간이 왜 낙서를 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납득하게 만든다.

낙서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
낙서의 역사와 낙서를 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읽어봤다면 낙서 자체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동시에,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고 창의력을 증대하는 효과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낙서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응용 인지 심리학 저널’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그저 낙서를 하면 약 29% 더 정보를 잘 기억해 낼 수 있다고 밝혔다. 놀랍지 않은가? 그 자세한 실험내용은 다음과 같다.(7)

2009년 플리머스 대학교 (Plymouth) 심리학자, 재키 안드라데(Jackie Andrade)는 낙서가 인지 능력(Cognitive ability)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실험 참가자 40명에게 2분 30초의 지루하고 엉뚱한 음성 메일 메시지를 모니터링하도록 요청했다. 그 후에 절반은 작업 수행하는 동안 낙서를 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통화 후 얼마만큼 음성 메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조사했다.
놀랍게도 낙서를 한 그룹의 실험 참가자들이 전반적으로 세부사항을 더 잘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수치는 29% 정도로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
또 비슷한 실험이 있다. 이번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의대생을 대상으로 낙서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사례 연구조사(Case Study)를 실시했다.(8)
실험 참가자, 미치코 마루야마(Michiko Maruyama)는 산업 디자인에서 의대로 편입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방대한 양의 의학 지식을 빠르게 암기해야 하는 공부 방식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매일 30분간 색연필로 낙서를 하게 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녀의 학업 성취도는 눈에 띄게 좋아졌고, 낙서를 활용한 공부 방식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녀는 연구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저에게 낙서는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하고 지식의 공백을 메워주는 학습 도구였습니다. 간단한 30분 낙서가 막대한 의학 정보를 정리해서 기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공부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낙서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이유
만약 살인마가 당신을 죽이기 위해 큰 도끼를 들고 쫓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사건에 직면하면 인체 생존을 위해 그 위험에 대항할 것인지 혹은 도망갈 것인지 빠르게 판단한다. 그리고 뇌의 자율신경계가 혈액 내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여 신체가 가장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준비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라고 한다.
갑자기 살인마와 낙서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할 것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지루함을 느낄 때도 투쟁-도피 반응이 나타난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은 졸릴 때 경계심이 낮아지고, 적의 위협에 신속하게 대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졸음을 해소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는 다른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지루한 수업시간에 타인과 잡담을 하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그리고 낙서를 하는 등의 활동들이 이에 속한다.
그중 낙서는 다른 활동보다 상대적으로 뇌에 부담을 적게 준다. 그리고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준다. 쉽게 말해 에너지 효율 대비 성능이 가장 좋은 활동이라 볼 수 있다. (9) 그래서 낙서 행위를 명상과도 같은 정신활동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낙서 혁명(The Doodle Revolution)’의 저자, 수니 브라운(Sunni Brown)도 그중 한 명이다. 수니 브라운은 낙서가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바꿔놓는 위대한 활동이라고 주장하면서, 낙서가 정신이 산만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이끌어 준다고 설명한다.(10)
우리는 낙서를 신체와 신경에 극적인 변화를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스트레스 해소 및 집중력 향상을 위한 낙서
수니 브라운(Sunni Brown)이 ‘낙서의 긍정적인 효과’를 주장하기 한참 전인 1938년에도 아무런 의미없는 그림이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어 일에 더 쉽게 집중할 수 해준다고 연구결과가 있다.(11) 연구 논문에서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채울 수 없는 자신의 무의식, 그리고 숨겨진 측면을 그림을 통해 찾아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낙서로 기억의 잃어버린 파편을 찾아 현재로 가져옴으로 심리적 고통이 줄어든다는 설명으로 낙서가 스트레스 해소를 해주는 이유를 밝혔다.

많은 인지 심리학자와 의사들은 비슷한 견해를 갖고있다. 시애틀 대학(he University of Seattle)의 인간 개발 연구소 이사였던 로버트 번교수( Dr. Robert Burns)는 낙서를 사용해 환자의 정서적 문제를 진단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꿈으로 무의식 세계를 탐색하듯이 낙서로 숨겨진 내면의 비밀을 파해친다. 아무 의미 없는 임의의 선, 도형, 그리고 얼굴 낙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작위가 아니며, 뇌파 검사를 통해 뇌 활동을 종이에 측정하듯이 무의식적인 사고 패턴이 손을 통해 낙서로 표현된다는 것이 그는 주장한다.(12)
위의 다양한 실험 결과에서 보았듯이, 낙서는 스트레스 해소 및 집중력 향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이 현대 심리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마무리 – 낙서 그 존재 이유
낙서는 인문학적,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인류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던 고유의 행동 양식 중 하나다. 그리고 재미를 위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우리가 낙서를 하고 있다고 밝혀졌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한 숨겨진 다른 뜻밖의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만큼 낙서는 매력적인 미지의 우주와도 갖다.
그래서 아직도 낙서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실험이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정신과 의사들은 좀 더 간편하며, 안전하고, 빠르게 심리적 문제를 진단할 수 있는 낙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학업이나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없거나 자신의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느낀다면 매일 낙서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모르지 않은가? 비싼 값을 지불했던 정신과 상담의사보다 더 나을지.
조만간에 낙서로 사람의 심리를 진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때까지 당신이 언제 어디서든 늘 건강하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여기서 바라고 있겠다.
출처
- 1) 강창욱 기자, 화장실 벽 음담패설… 인간은 왜 낙서를 끄적이는가, 국민일보, 2019/2/23
- 2) 김선희, 어린이 낙서의 교육인간학적 연구, 동아대 대학원 교육학과, 2013
- 3) 이승호 기자, 심리학으로 알아 본 낙서, 그 존재의 이유, 연세춘추, 2006/3/11
- 4) Nick Haslam, Psychology in the Bathroom, 2012/6/7
- 5) 진중권 정재승,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2- ⑬ 낙서, 한겨레21, 2011/9/7
- 6) LINDSAY POUI-DI, Doodling: Why do I scribble when on the phone or in a meeting?, Marie France Asia, 2015/1/19
- 7) Jackie Andrade, What does doodling do?, Cognitive Psychology, 2009/2/27
- 8) Carol Ann Courneya, Medical doodles: 30 minutes well spent,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nal, 2012/9/4
- 9) Srini Pillay,The “thinking” benefits of doodling, Harvard Health Publishing Medical School Blog, 2016/12/15
- 10) Sunni Brown, The Doodle Revolution: Unlock the Power to Think Differently, 2015/5/16
- 11) W. S. Maclay, E. Guttmann & W. Mayer-Gross, Spontaneous Drawings as an Approach to some Problems of Psychopathology, 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1938/4/12
- 12) Dr Stephen Juan, Why do we doodle?, The register, 2006/10/13